구례 땅에 발을 디딘 건, 어쩌면 오래된 약속을 지키기 위한 발걸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섬진강의 물안개가 몽환적으로 피어오르는 아침, 나는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구례 오일장으로 향했다. 3일과 8일마다 열리는 장날의 활기를 느껴보고 싶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백련산방’이라는 밥집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핸드폰 속 네비게이션이 길을 조금 헤매게 했지만, 다행히도 그리 붐비지 않는 주차장에 차를 댈 수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12시 전, 이른 점심시간 덕분인지 자리는 넉넉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정겨운 나무 내음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벽면 한쪽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취가 담긴 사진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언뜻 보이는 사진 속 풍경들은 수해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따뜻한 손길들을 담고 있었다. 밥집 한켠에는 시원한 연꽃 그림이 드리워진 창이 있어, 소박하면서도 정갈한 분위기를 더했다.

메뉴판을 보니 ‘백련산방 정식’, ‘석쇠불고기’, ‘생선구이’, ‘재첩국’ 등 소박하면서도 향토적인 메뉴들이 눈에 띄었다. 1인 2만원으로 가격이 인상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전라도 한정식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망설임 없이 정식을 주문했다. 잠시 후, 쟁반 가득 푸짐한 음식들이 식탁 위에 차려졌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역시 석쇠불고기였다. 뜨겁게 달궈진 뚝배기에 담겨 나온 불고기는 윤기가 자르르 흘렀고, 코를 찌르는 불향이 식욕을 자극했다. 그 위에는 싱싱한 파채가 듬뿍 올려져 있어 먹음직스러움을 더했다. 젓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불고기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으니, 은은한 숯불 향과 함께 달콤 짭짤한 양념이 입안 가득 퍼져 나갔다. 질기지 않고 부드러운 식감 또한 훌륭했다.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등장한 고등어구이 역시 빼놓을 수 없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구워진 고등어는 짭짤한 간이 배어 있어 밥반찬으로 제격이었다. 특히 겉 부분을 살짝 태우듯 구워, 불맛을 더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젓가락으로 살점을 발라 따뜻한 밥 위에 올려 먹으니,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뜨끈한 재첩국은 시원하면서도 깊은 맛을 자랑했다. 맑은 국물 안에는 뽀얀 재첩이 듬뿍 들어 있어, 숟가락으로 떠먹을 때마다 입안 가득 풍성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이 재첩국은 섬진강에서 갓 잡아 올린 신선한 재첩으로 끓여낸다고 하니, 그 신선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정식을 시키면 함께 나오는 밑반찬들은 하나하나 정갈하고 맛깔스러웠다. 특히 아카시아 짱아찌는 처음 맛보는 독특한 맛이었는데, 달콤하면서도 향긋한 아카시아 향이 입안 가득 퍼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짭짤한 파김치 역시 밥도둑이 따로 없었다. 이 외에도 다양한 나물 반찬들이 푸짐하게 차려져, 건강한 한 끼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물 대신 제공되는 500ml 생수병에서, 그리고 반찬 하나하나 각을 맞춰 내어주시는 모습에서, 주인장의 세심한 배려를 엿볼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사장님께서 직접 담그신 솔순차를 내어주셨다. 은은한 솔향이 감도는 차를 마시니, 입안이 개운해지는 것은 물론, 왠지 모르게 건강해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았다. 49첩 반상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반찬 가짓수가 많지는 않았다. 또한, 석쇠불고기에서 불맛보다는 매캐한 연기 맛이 느껴진다는 의견도 있었다. 재첩국이 너무 짜다는 불만도 간혹 들려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련산방은 구례에서 맛있는 한 끼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곳임에는 틀림없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장님의 푸근한 인심이었다. 4명이 방문했는데 정식 3인분만 시켜도 충분하다고 권해주시는가 하면, 막걸리를 주문하니 돼지감자 안주를 넉넉하게 내어주시기도 했다. 이러한 따뜻한 정 덕분에, 백련산방은 단순히 밥을 먹는 공간을 넘어, 정을 나누는 따뜻한 공간으로 느껴졌다.
백련산방에서의 식사는, 마치 고향집에 방문한 듯 푸근하고 정겨운 경험이었다. 화려하거나 세련된 맛은 아니었지만, 정갈하고 깔끔한 음식, 그리고 푸짐한 인심 덕분에, 든든하고 행복한 한 끼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구례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백련산방에 들러 전라도의 따뜻한 정을 느껴보는 것을 추천한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어느새 구례 오일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활기 넘치는 시장 풍경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섬진강을 따라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백련산방에서 맛본 따뜻한 밥 한 끼는, 오랫동안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다음에 다시 구례를 방문하게 된다면, 꼭 다시 들러 그 푸근한 인심과 맛있는 음식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다. 그때는 사장님께서 호탕하게 웃으며 나눠주시던 시원한 냉면도 꼭 맛봐야지.
